AI 번역 시대, 통번역사는 사라질까 - 현실과 생존 전략
AI 번역 시대, 통번역사는 사라질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5년 전과 지금의 AI 번역은 완전히 다른 물건입니다. DeepL은 웬만한 비즈니스 문서를 사람보다 빠르고 자연스럽게 번역하고, ChatGPT는 맥락까지 파악해서 번역합니다. 통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다면, 불안한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통번역사가 사라진다"는 말은 반만 맞습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사라지고 어떤 일이 남는지, 냉정하게 들여다봅시다.
AI 번역의 현재 수준
AI가 잘하는 것
AI 번역이 압도적으로 잘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 정형화된 비즈니스 문서: 계약서, 매뉴얼, 제품 설명서. 패턴이 반복되는 문서는 AI가 빠르고 정확합니다.
- 기술 문서: API 문서, 소프트웨어 UI 텍스트 등 용어가 명확한 분야에서 일관성 있는 번역을 합니다.
- 대량 번역: 수천 페이지를 며칠이 아니라 몇 분 안에 처리합니다.
- 일상 커뮤니케이션: 이메일, 채팅, 간단한 보고서 수준은 사람이 개입할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DeepL Pro, Google Translate, ChatGPT, Claude 등은 영한 번역 기준으로 이미 실무에 바로 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AI가 못하는 것
반면 AI가 여전히 헤매는 영역도 분명합니다.
- 중의적 표현과 뉘앙스: "그건 좀 그렇죠"를 영어로 옮길 때,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번역이 필요합니다. AI는 맥락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 문화적 코드: 한국 특유의 존댓말 체계, 나이와 관계에 따른 어투 변화, 사회적 맥락을 AI가 완벽히 처리하기는 아직 어렵습니다.
- 창작적 텍스트: 소설, 시, 광고 카피, 브랜드 슬로건. 단어 하나의 선택이 전체 인상을 바꾸는 영역에서 AI는 평범한 결과를 냅니다.
- 실시간 통역: 화자의 감정, 말 끊김, 비언어적 신호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동시통역은 AI가 아직 넘지 못한 벽입니다.
통번역사 시장의 현실적 변화
솔직한 현실입니다.
단가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단순 번역 단가는 이미 상당히 하락했습니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AI로 80% 해결되는 일에 예전 단가를 줄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일반 문서 번역, 자막 번역, 웹사이트 현지화 같은 영역은 AI + 저단가 포스트에디터 조합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수요 구조가 바뀌고 있습니다. 번역 수요 자체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글로벌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번역할 것은 더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수요의 대부분을 AI가 먹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뢰되는 건은 고난도, 고부가가치 작업으로 압축되고 있습니다.
진입 장벽이 높아졌습니다. 예전에는 외국어를 잘하면 번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외국어 실력만으로는 AI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AI가 못하는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통번역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AI가 해당 업무의 80%를 자동화할 수 있는 모든 직업이 겪고 있는 현상입니다.
AI가 대체 불가능한 번역 영역
그렇다면 어디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을까요.
문학 번역
소설, 에세이, 시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닙니다. 작가의 문체, 리듬, 의도를 다른 언어로 재창조하는 작업입니다. AI가 "정확한" 번역을 할 수는 있지만, "아름다운" 번역은 아직 사람의 몫입니다.
마케팅 로컬라이제이션과 트랜스크리에이션
"Just Do It"을 한국어로 어떻게 옮길까요? 직역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현지 문화와 감성에 맞게 메시지를 새로 만드는 트랜스크리에이션은 언어 능력 이상의 문화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동시통역
국제회의, 비즈니스 협상, 외교 현장의 동시통역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분위기, 의도, 비언어적 신호까지 읽어야 합니다. AI 동시통역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중요한 자리에서 기계에 맡기기엔 리스크가 큽니다.
전문 분야의 고급 번역
의료, 법률, 특허, 금융 분야는 오역이 곧 사고입니다. 약물 투여량 하나, 계약 조건 하나가 틀리면 돈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걸립니다. 이 영역에서는 여전히 전문 번역가의 검수가 필수입니다.
통번역사 생존 전략 5가지
1. AI 포스트에디팅 전문가
AI가 1차 번역을 하고, 사람이 교정하는 모델이 업계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MTPE(Machine Translation Post-Editing) 전문가는 AI 번역의 오류를 빠르게 잡아내고 품질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AI를 경쟁자가 아니라 도구로 쓰는 겁니다. 포스트에디팅 속도와 정확도를 갖추면, 같은 시간에 3-4배 많은 작업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2. 전문 분야 특화
의료 번역, 법률 번역, 기술 번역, 특허 번역. 이런 분야는 해당 분야의 지식이 없으면 번역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AI가 일반 번역을 먹어치울수록, 전문 분야 번역가의 희소성은 오히려 올라갑니다.
번역 실력 + 전문 지식. 이 조합이 있으면 단가 하락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3. 크리에이티브 번역과 트랜스크리에이션
광고, 브랜딩, 게임,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번역은 창의력이 핵심입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현지 소비자의 감성에 맞게 재창작하는 능력은 AI에게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한류 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으로 한국어 크리에이티브 번역 수요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4. 통역 +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단순히 말을 옮기는 것을 넘어, 이문화 간 소통을 돕는 컨설턴트로 확장하는 전략입니다. 비즈니스 협상에서 상대방의 문화적 맥락을 설명하고, 소통 전략을 제안하는 역할은 AI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통역사에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포지셔닝을 바꾸는 겁니다.
5. AI 번역 품질 관리자
번역 회사나 글로벌 기업에서 AI 번역 시스템의 품질을 관리하고 개선하는 역할입니다. AI 번역 엔진을 평가하고, 용어집을 관리하고, 번역 가이드라인을 설계합니다.
번역 경험이 있는 사람이 AI 시스템을 이해하면, 이 포지션에서 강점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실천 가이드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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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번역 도구를 매일 써보세요. DeepL, ChatGPT, Claude로 같은 문장을 번역해보고,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세요. 적을 알아야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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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PE 워크플로우를 익히세요. AI가 번역한 결과물을 교정하는 연습을 하세요. 어디서 오류가 나는지 패턴을 파악하면 속도가 빨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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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분야 하나를 정하세요. 의료, 법률, IT, 금융 중 관심 있는 분야를 골라 관련 지식을 쌓으세요. 해당 분야 용어집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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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커뮤니티에서 트렌드를 따라가세요. ProZ, TranslatorsCafe 같은 글로벌 번역 커뮤니티, 국내 통번역사 모임에서 업계 변화를 모니터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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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세요. "영어 번역 가능"이 아니라 "의료 분야 영한 번역 + AI 포스트에디팅 전문"처럼 구체적으로 포지셔닝을 바꾸세요.
마무리
통번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 번역만 하는 통번역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AI 번역이 아무리 좋아져도, 언어의 미묘한 결은 사람만이 다룰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AI를 도구로 활용하면서, AI가 못하는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춘 사람. 그게 앞으로 살아남는 통번역사의 조건입니다.
변화가 빠릅니다. 하지만 빠른 변화 속에서도 방향을 잡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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